*소리가 큽니다. 소리를 줄인 후 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창밖이 온통 붉었다.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와 머리를 쾅쾅 울리기도 했다. 승협은 책상 의자를 빙글 돌려 뒤편에 앉은 동성을 보았다. 동성은 케이블을 연결하지 않은 베이스 현을 손끝으로 튕기며 소란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어른스러운 척, 차분한 척 하려는 표정이 우스워서 웃었더니 손이 멈췄다. 아, 너무 크게 웃었나?
“왜. 잘 듣고 있었어.”
“여기서 무슨 소리가 나요.”
동성은 어깨에 건 베이스를 들어 소파 옆에 기대어 놓은 뒤 승협을 불렀다. 제 옆으로 와 달라고 툭툭. 승협은 의자 바퀴를 끌어 슥슥 다가갔다. 신발을 벗어 소파 위로 건너가자 전보다 살이 붙고 단단해진 팔뚝이 승협의 허리를 감아 왔다. 어제 밤부터 감기 기운이 있던 승협은 두꺼운 후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동성은 당했다는 표정으로 승협의 상의 안으로 밀어 넣었던 손을 빼냈다. 승협이 씩 웃었다. 고개를 숙여 동성의 상심한 입술을 한입 베어물면서.
“너 이놈 자식. 갈수록 손만 빨라지냐.”
“형들이 보여 주는 게 있다 보니.”
말려 올라간 후드 티 아래로 검은색 밋밋한 티셔츠 자락이 보였다. 승협은 그것을 바지 안에 갈무리해 집어넣었다. 그리고 동성의 손등 위로 깍지를 껴 넣었다. 동성은 아까보다 풀린 표정으로 승협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엄청 커요.”
“네 머리보다 크지.”
“형이 그 손으로 안아 줄 때가 좋아요.”
“와, 진짜? 여기서 그런 말을?”
승협의 과장스러운 말투에 힉 웃은 동성이 제게 다가오는 승협의 가슴을 밀어 소파 위로 넘어뜨렸다. 세게 민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이 쓰던 것을 가져온 소파는 부시럭부시럭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문이 열렸다. 회승이 다섯 잔의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포개진 승협과 동성을 본 회승의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승협은 발뒤꿈치로 동성의 어깨를 살살 밀어내며 손을 내밀었다. 내 커피.
“형은 나보다 커피가 더 좋죠.”
“에이. 말을 왜 그렇게 하나? 일으켜 줘.”
승협은 누운 채로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동생들을 보챘다. 회승과 동성이 승협의 팔을 한 짝씩 잡았다. 둘 다 힘이 엇비슷했다. 당기는 힘은 회승이 셌고 버티는 힘은 동성이 셌다. 승협은 늘어나 반쯤 벗겨진 양말을 꼬물꼬물 고쳐 신으며 회승이 내미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창밖은 여전히 붉었다. 불길의 열기가 이곳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실은 커피의 온기였다.
회승은 승협의 책상 의자에 앉아 몸을 한 바퀴 굴렸다. 발로 차는 힘이 조금 모자라서 아까 그 자리로 완전히 돌아오려면 발을 한 번 더 굴려야 했다. 커피를 쭉쭉 빨아들이는 볼이 빨갰다.
“아까보다 열 더 오른 건 아니죠? 병원은 언제 가요?”
“이따 훈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 걔도 목이 따갑다고 해서.”
“그 형은 맨날 아파.”
“이번에는 나한테 옮았다는데, 나는 목감기 아니거든? 하여간 웃기다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성큼성큼 발소리가 바로 문 바깥에서 멈췄다. 길어서 손등을 다 덮은 소매가 회승이 닫고 오지 않은 문틈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입으로 흉내 낸 노크 소리가 일부러 침묵을 꾸민 작업실에 울려퍼졌다. 똑똑.
“형. 영구 형이 빨리 내려오래.”
훈은 알록달록한 스카프인지 손수건으로 목을 감싸고 있었다. 목이 희고 가늘어서 유치하거나 촌스럽지 않고 예뻤다. 회승이 훈의 커피가 든 종이 가방을 흔들었다. 훈이 냉큼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게 내 거야?”
“형 무슨 차 사달라고 했더라? 그게 다 팔려서요. 형 단 거 좋아하시니까, 유자차 사왔어요.”
“아, 진짜 나한테는 우리 승구밖에 없다.”
호랑이가 가는데 호랑이 꼬리가 따라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극적인 등장을 노렸던 것인지 재현이 작업실 문을 박찼다. 손에는 훈의 겉옷을 들고. 훈이 아, 아 하며 제 이마를 쳤다. 내 옷. 혼자 커피를 들고 있지 않았던 재현은 제 커피를 찾아 두리번거리면서도 훈을 나무랐다.
“너는 옷도 그렇게 입었으면서 어떻게 껍질을 아무 데나 벗어두고 다녀?”
“내가 뱀이야? 매미야? 껍질 벗고 다니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근데 내 건?”
설마설마, 아니지아니지 발을 동동 굴리는 재현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회승이 커피를 가렸던 몸을 치웠다. 사실은 드럼 치는 팔뚝에 응징당하고 싶지 않은 거였지만, 어쨌거나. 울먹이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불이 생각보다 크게 난 모양이었다. 차가 이십 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꼼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퇴근 시간대까지는 멀었으니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것이라는 장담을 했던 매니저는 식은땀을 닦으며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핸들 커버에는 마이 멜로디 핀 버튼이 붙어 있었다. 재현이 저랑 닮지 않았느냐며 제 생각 하라고 달아 놓은 것이었는데, 재현이 없을 때는 생각이 나지 않았고 재현이 있을 때는 눈치가 보여서 떼지 못하다 보니 반년째 제 자리를 지키는 장한 놈이었다.
그 당사자는 뒷좌석에 앉아 훈을 귀찮게 하고 있었다. 훈은 감기 기운 때문인지 멀미가 난다며 자려고 했는데, 길어지는 이동 시간에 지루했던 재현이 훈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급기야는 폭발한 훈이 짜증을 냈다.
“그러게 그냥 거기 있으라니까 왜 따라와서 사람을 못살게 굴어?”
“우리는 금붕어와 금붕어 똥 같은 사이니까.”
“하필 비유를 들어도 똥이 뭐야.”
“너는 로망이 감자랑 맛동산 이야기 하잖아?”
“그게 이거랑 같아?”
다를 건 뭐냐며 훈을 살살 약올리던 재현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다. 차에 탄 네 사람 중 가장 먼저 휴대폰이 울린 탓이었다. 요란한 진동과 함께 삐이, 삐이 하는 경고음이 터져나왔다. 그 다음에는 훈의 휴대폰이었다. 그 다음에는 영구. 마지막으로 승협. 승협은 메시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회승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엉겁결에 녹색 통화 버튼을 눌러 버린 승협이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아, 형!
“형, 영상! 영상!”
“앗. 미안.”
사과하며 휴대폰을 눈앞으로 가져오는데, 아까보다 하늘이 더 붉었다. 하늘 전체에 단풍이 든 것 같았다. 시월 말보다는 십일월 초 즈음, 한창때의 단풍.
화면 속에서는 회승과 동성이 동시에 입을 벌려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통신 상태가 좋지 않은지 영상이 자꾸만 끊겼다. 음성도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회승과 동성은 작업실이나 회사 실내가 아닌 것 같았다. 이따금씩 거칠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멈춘 화면에서 주파수를 잡지 못한 라디오 소음처럼 터져 나왔다.
“뭐라고? 얘들아, 지금 하나도 안 들리거든?”
통화는 그대로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 채 끊겼다. 승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까 미처 확인하지 못한 긴급 메시지를 확인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진화 작업이 더뎌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인근 주민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대피해 달라는 부탁도 함께였다.
삐이 소리가 끊길 만하면 이어졌다. 사실은 아까부터 계속되었는데 사이렌 소리에 익숙해진 탓에 금방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이었다. 메시지는 거듭해서 갱신됐다. 불길이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약국에서 해열제와 항생제만 사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승협이 앞장을 섰고 훈과 재현이 바람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인채 따라 걸었다. 바람에는 도대체 어디서 날아오는 것인지 모를 재가 섞여 코를 아프게 만들었다. 감기 환자가 아닌 재현도 코가 맵고 아프다고 징징거릴 정도였다. 매니저는 차마 막힌 도로에 차만 두고 나올 수가 없어 세 사람을 먼저 보냈다.
승협은 휴대폰을 왼쪽 귀에 갖다 댔다 오른쪽 귀에 갖다 댔다를 반복하며 이를 딱딱 부딪혔다. 눈에서 눈물이 나고 코가 따가운 것과는 별개로 바람이 너무 셌다.
“이상하네. 신호가 안 가.”
“통화량이 많아져서 그런 거 아냐? 왜, 전에, 설날에도. 카톡 터졌었잖아.”
“그런가…….”
하기는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승협처럼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공중전화 박스로도 달려갔지만 헛수고인 듯했다. 동전만 날리고는 뛰쳐나오기 일수였다. 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승협이 빨갛게 곱아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주머니에 넣었다.
숙소가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승협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승과 동성이 둥지에서 머리만 내민 제비 새끼들처럼 승협과 훈과 재현을 소리쳐 불렀다. 제비는 지지배배 예쁘게 울었는데 쟤네는 낮은 목소리로 승협이 형! 훈이 형! 재현이 형! 하는 게 달랐다.
“뭐야. 웬 카트? 그것도 두 대씩이나. 돈이 어딨다고 저걸 다 샀어?”
“형 카드 긁었어요.”
“뭐? 아, 아까 커피 사오라고 줬구나.”
두 사람 옆에는 대형 마트의 카트 통째로 먹을 것들이, 그리고 생필품 조금이 담겨 있었다. 승협은 꽁꽁 언 손으로 휴대폰을 움직여 출금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입이 떡 벌어졌다. 승협이 살면서 평생 현금으로 쥐어 본 적은커녕 써 본 적 없는 단위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너희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형. 터졌대요.”
“내 신용 등급도 터졌어, 얘들아. 신용 불량자의 노래는 아무도 들어 주지 않을 거라고.”
재현이 뒤에서 승협을 불렀다. 재현이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뉴스 특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헤드라인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읽기 힘들었다. 간신히 읽은 글자들은 뭐가 터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답답했는지 회승이 대신 읽어 주었다.
“백두산도 터졌고요. 한라산도 터졌대요. 하와이는 아직 한 번도 못 가 봤는데.”
“어, 하와이도? 미안. 내가 너무 미뤘지.”
“됐어요. 진짜 데려가 달라고 할 만큼 양심 없지는 않아서요. 아무튼, 그래서 대충 사봤거든요.”
회승이 카트 손잡이를 탕탕 치며 말했다. 누가 숙소 살림 책임지는 주부 아니랄까 봐서 멤버들이 좋아하는 간식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특히 훈이 정말 감동한 눈치였다.
“이 다음에 김재현 차는 데 성공하면 승구 같은 애인 만들어야지.”
“농담이지?”
“아닌데?”
승협은 그날 밤에 완전히 앓아 누웠다. 네 사람은 굳이 승협의 방으로 건너와 유튜브 생중계로 뉴스를 들었다. 무슨 특보가 연달아 터졌다. 세계 곳곳의 일까지 전달하다 보니 일 초가 아쉬울 지경이었다. 아나운서도 몇 번이나 교체됐다.
“진짜 바쁘겠다.”
“근데 우리는 이렇게 태평해도 돼?”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뭐 어쩔 거예요. 미국처럼 황무지를 달릴 수라도 있나, 뭐. 죽을 수밖에 없으면 죽는 거지.”
“회승아. 너 인생 2회차니?”
새벽에는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은 하늘이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으니 뉴스가 이야기하는 하늘도 아마 저 남쪽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승협은 머리를 옹기종기 맞대고 저희들끼리 이야기하기 바쁜 훈과 재현, 회승에게 입술을 삐죽이다 눈을 돌려 베이스 악보 외우는 데 정신이 팔린 동성을 보았다. 승협의 눈길을 느꼈는지 노트가 흔들리더니 동성이 옆으로 빼꼼 눈을 내밀었다. 눈이 마주쳤다. 헤헤.
“왜 그렇게 봐요, 형. 설렜어요.”
“설렜다는 과거형 아냐? 지금은 안 설레나 보지?”
“에이. 아니에요. 다른 형들은 뭐해요, 형이랑 안 놀아 줘요?”
승협은 대답하는 대신 눈짓으로 세 사람을 가리켰다. 킥 웃은 동성이 누워 있는 승협의 옆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로로 긴 눈이 선한 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승협은 손가락 사이에 땀이 채는 것을 느끼고 이불에 문질러 닦았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동성이 승협의 손을 가져와 깍지를 끼워 넣었다.
“이러면 덜하죠.”
“회승이한테는 비밀인데. 너 정말 귀엽다.”
“으하하.”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줘야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승협이 제게 등을 돌린 세 사람과 똑같이 등을 돌리고 누워 동성을 불렀다. 승협의 머리맡에 앉아 있던 동성이 슬금슬금 고개를 숙여 승협이 내민 손에 제 뺨을 기댔다.
“너 이러면 기분 좋다고 했지.”
“네. 형 손 진짜 커요. 우리 아빠 손보다 큰 것 같아요.”
“키스해 줄까?”
“진짜요?”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동글동글한 콧망울을 스친 입술이 수줍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벌어지는 입술과 맞닿았다. 감기 탓인지 평소보다 숨이 빨리 차올랐다. 동성은 아쉬운 표정으로 제 뺨을 감싼 승협의 손을 잡아 내렸다.
“회승이 형이 적당히 하고 나오래요.”
“뭐?”
“아. 내 차례야?”
회승이었다. 훈과 재현은 언제 나갔는지 빈 침대에 엎드리고 누워, 꽃받침한 손등 위로 방긋방긋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던 회승이 으차 하는 씩씩한 기합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나는 또 아침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했지.”
진작에 떨어진 물수건이 회승의 발끝에 채여 날아갔다. 승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코감기가 목으로 내려갔는지 목이 화끈거렸다.
“다른 애들은. 훈이랑, 재현이랑…….”
“형이 동성이랑 뽀뽀하는 거 보고 별꼴이라면서 나갔어요.”
“어흠. 그걸 또 보고 그래.”
“저는 같이 별꼴 한 번 해 보려고 기다렸고요.”
해 주실 거죠. 승협이 누운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은 회승이 물었다. 머리 위에서 동성의 재미있어 죽겠다는 웃음소리가 히죽히죽 새어 나왔다. 회승이 주먹을 들어 동성에게 가져갔다. 동성도 주먹을 쥐어 콩 부딪혔다.
훈은 회승이 사 온 간식을 같은 날에 끝장낼 생각인 것 같았다. 재현은 뜨거운 보리차를 두 잔 담아서 가져오다 깜짝 놀라서 뛰어왔다. 잰걸음으로 발바닥을 질질 끌면서 걸어오는데 걸을 때마다 바퀴벌레가 배를 깔고 기는 소리가 났다. 순간 상상해 버린 훈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재현이 물었다.
“너 그걸, 그걸 다 먹게?”
“그러면 안 돼?”
“아냐…… 아냐. 우리 훈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재현은 말을 바꾸어 훈에게 갖은 아양을 다 부렸다. 훈은 저게 왜 저러나 하다가도 재현이 제 다리를 베며 머리를 쓸어 달라고 말하자 순순히 그렇게 했다. 재현은 염색, 탈색, 파마를 그렇게 했는데도 머리카락이 실내견처럼 부드러웠다. 씻어서 좋은 향기도 났고. 거기에 훈이 먹는 초콜릿 과자 냄새가 섞여, 훈이 가장 좋아하는 냄새로 바뀌었다.
훈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본 재현이 냉큼 말했다. 양팔에는 야윈 허리를 넉넉하게 끌어안고.
“그러니까 나 차지 마.”
“생각해 보고.”
훈은 그 뒤에 고개를 숙여 칭얼거리는 재현에게 입을 맞췄다. 재현은 눈꼬리와 입꼬리를 한껏 당겨 웃었다. 좋아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지구가 당장 멸망하더라도 더는 미련이 없다는 것처럼. 가지런하고 하얀 이가 활짝 드러났다.
“너를 정말 좋아해, 훈아.”
“알아. 네가 나 아니면 누굴 좋아하겠냐.”
훈은 손가락으로 아홉 번의 햇수를 헤아렸다. 내가 아니면. 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는 재현이 지어내는 것과는 다르게 보였지만 의미는 같았다. 눈꼬리가 올라가는 바람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재현은 알고 있었다. 훈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렌즈를 끼지 않았는데도 커진 눈동자는 솔직했다.
재현은 평소보다 시꺼먼 하늘을 보다 물었다. 키스해도 돼? 훈은 마지막 막대 과자를 입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하든지.”
“으흠.”
“왜 웃어.”
“진짜 좋아해.”
“아이고, 알고 있다니까…….”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져버린 것은 훈이었다. 열로 잔뜩 데워진 입술부터, 빨개진 눈까지. 좋아한다는 레퍼토리를 백 가지로 늘려 외워 대는 재현을 입을 막기 위해서. 사실은 그런 핑계로.
승협은 티셔츠 안쪽으로 허리를 두른 회승의 팔을 풀어낸 뒤 몸을 일으켰다. 동성이 의자에 앉아 불편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승협은 동성의 등과 허벅지 밑에 팔을 끼워 넣고 들어 올려 회승의 옆에 옮겨 놓았다. 어찌나 곤하게 잠들었는지 승협이 허리를 삐끗하고 비틀거렸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잠깐 잠에서 깨어난 회승이 승협의 허리 옷자락을 잡아 끌며 물었다. 어디 가여, 형.
“물 마시러.”
“금방 올 거죠.”
“내가 너를, 너희를 두고 어딜 가겠냐.”
회승은 그제야 씩 웃어서 승협을 배웅했다. 승협은 허리를 구부려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피워 대는 회승의 머리를 꽉 안아 주고 방을 나섰다. 거실 소파에는 훈과 재현이 한몸처럼 포개져서 잠들어 있었다. 이불이 발치까지 밀려나 있었다. 승협은 깔깔한 목에 물 대신 침을 삼키며 거실로 걸어가 이불을 덮어 주었다. 훈이 눈을 떴다가 도로 감았다. 잘 자. 하늘은 여전히 깜깜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승협은 주전자의 물을 따라 버리고 새 물을 받았다. 그리고 어제 회승이 사 온 보리차 티백을 찾아 싱크대에 달린 수납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