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도 얼마 되지 않던 사망보험금이 다 떨어져갔다. 승협은 라면 봉지 안의 부스러기들까지 입에 싹 털어 넣었다. 끓인 라면이 무슨 맛인지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역시 안성탕면 면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아. 봉지를 꼬깃꼬깃 쪽지 접어 방구석 비닐봉지에 던져 넣었다. ‘먹기’라는 시간 때우기 좋은 활동이 끝나자 승협은 다시 심심해졌다. 어릴 때 읽던 책들은 너무 많이 읽어 재미없고, 게임 같은 것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제 할 일 열심히 하는 전등만 유심히 관찰했다.
아르바이트 한 탕 더 뛰어야하나. 이미 쪼개질 대로 쪼개진 시간들을 더 잘게 부숴보고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새벽에 신문 배달 돌리고, 낮에 카페에서 청소하고, 저녁에 고깃집에서 서빙하고, 야간에는 편의점 지키고. 비는 시간을 만들래야 만들 수가 있나... 아니면 집을 더 좁은 데로... 집은 이미 승협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싼 집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름만 되면 아주 생지옥이 다름없었다. 그마저도 몇 년 살다보니 익숙해진 것이다. 그렇게 안 쓴다고, 안 쓴다고 한 사망보험금이 다 떨어져가니... 저를 이렇게 만든 두 죽음이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다.
승협의 부모님은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학교 때문에 승협은 가지 못한 가족여행을 가는 길에, 그 확률 낮다는 비행기 사고가 발생했다. 그 비보를 승협은 학교에서 들었고, 주저앉을 기력조차 없었다.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승협에게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 돈을 쓸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받는 돈이라니,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살아가긴 살아가야 해서, 아끼고 아껴 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가는 것은 포기했다. 돈만 많이 들고, 그렇게 해서 대학교에 들어가 보았자 또 소모되는 것은 돈이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아르바이트나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것이 더 마음 편한 일이었다.
생라면이나 참치통조림 따위의 것들로 끼니를 하루하루 때워가는 인생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비극적 역사를 가진 아이의 삶 치고는 나름 독립적, 자립적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만족했다. 내년이면 성인이니, 일을 구하는 데 이런 저런 제약들도 사라질 터였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성인이 되기를 기다리고, 한편으로는 성인이 되기 싫은 승협이었다. 정말 그들의 자리를 대신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성인이라는 말은.
승협이 일하는 편의점 앞은 작은 놀이터였다. 밤에는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가끔 학생들이 그네에 앉아 놀다가는 그런 작은 동네 놀이터였다. 이 동네는 아이들도 그렇게 많이 살지 않는데 왜 아직까지 남아있는 거지 싶었지만 철거하는 것도 돈이라는 생각이 들어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같은 옷차림의 같은 남자가 미끄럼틀 끝에 걸터앉아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다,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하다 새벽 같이 일어나 떠나는 것을 승협이 목격했다. 코끝에 걸친 동그란 안경은 알이 없는지 남자의 눈을 투명하게 보여주었고, 편의점과 놀이터는 정말 가까워서 승협은 그 남자를 관찰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입은 옷은 교복인 듯했다. 그런데 매일 교복을 입고 놀이터에 와 자고 가는 이 남자는 표정이 없었다. 세상 짐을 모두 혼자 짊어진 것도 아니고, 그리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약간, 인생 뭐 있나- 하는.
승협은 시선을 돌려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거의 없는 야간 시간대에는 매대 정리하는 게 시간이 제일 잘 가는 일이었다. 유통기한 확인하고, 얼마 안 남은 거 앞으로 빼놓고, 폐기처리할 거 있으면 체크해 뒀다가 시간 되면 폐기하고. 매장에 발자국이 좀 많다 싶으면 걸레로 한 번 닦아주고. 그러다 손님이라도 오면 재빨리 카운터로 돌아와 계산도 해드리고. 하는 아르바이트들 중에 승협이 가장 만족하는 일이었다. 굳이 사람들 많이 안 마주해도 되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다만 조금 심심한 시간이 찾아올 뿐인데, 요즘은 그것도 저 남자를 구경하는 일에 써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남자라기엔 승협의 눈에는 남자애에 가까웠다.
그날따라 그 아이는 유독 잠을 청하지 못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가 보다. 배가 고픈지 배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보고 승협은 방금 폐기 처리한 삼각김밥이라도 줄까, 싶었지만 괜한 오지랖은 제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에 집었던 김밥을 내려놓았다. 쟤가 잠들면 청소나 해야지, 하던 찰나 아이가 제 통통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승협은 아까 놓았던 김밥과 휴지를 챙겨 편의점을 나섰다. 앞치마도 벗어놓지 않고 그냥 나갔다. 빈 편의점에는 승협이 울린 종소리만 공허히 울렸다.
저벅, 저벅. 놀이터 모래가 밟히는 소리에 아이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다 해진 검은색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고개를 들자 파란색 앞치마가 보였고, 더 들자 기다란 손에 들린 휴지와 삼각김밥이 있었다. 그 손은 닦으라는 듯 아이의 손에 휴지를 쥐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눈가를 꾹꾹 눌러 눈물 자국을 없앴다. 그리고 다시 쥐어진 삼각김밥을 뜯어 살짝 물고 우물우물했다. 차가웠다.
“아, 데워올 걸 그랬다. 미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승협은 그것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아이를 바라보았다.
“몇 살이야?”
“열일곱 살.”
“집에 안 들어갈 거야?”
“...”
“그럼 형이랑 갈래? 가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놀이터보단 괜찮을 거야.”
충동적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같이 살자는 요청을 할 만큼 승협은 여유 있는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그럴 만한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두 손에 얼굴을 묻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처절해서 왠지 모르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 손이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승협은 다리를 펴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따라 일어선 아이를 데리고 편의점으로 들어가 카운터 안의 작은 의자에 아이를 앉혔다. 또 평소에 애용하던 낡은 담요도 덮어주었다. 아까 전에 폐기 처리되었던 핫초코를 타 손에 쥐어주자 아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띄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는 승협의 입꼬리도 슬쩍 웃어보였다. 속에서 누군가가 이승협 미친놈아, 너 혼자 살기도 힘든데 사람을 들인다고? 라고 소리쳤지만 주먹을 한 대 날려버렸다.
‘띡- 띡- 띡- 띡- 띠로링-’
“신발은 그냥 거기다 벗어놓으면 되고, 그냥, 편하게 있어.”
“...네.”
“말 편하게 해. 나 열아홉이야. 아저씨 아니야. 이상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
“아, 이름이 뭐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해서.”
“차훈, 훈이에요.”
“아무래도 말 놓는 건 오래 걸릴 것 같네.”
훈은 말이 없었다. 승협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 외에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승협도 굳이 훈에게 말을 시킬 마음은 없었고, 훈이 그리 행동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몇 시간 만에 모르는 사람 집에 살게 되었고, 모르는 사람과 한 방 한 침대에 자게 되었으니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을 것이니.
승협에게 배어있는 친절은 훈을 녹였다. 지난 몇 년간 누구에게도 베풀어지지 못한 친절은 한 사람에게 쏟아내졌고, 훈은 처음 그것이 부담스러워 어색해하기도 했지만 점점 스며들어 그에게 녹아들어갔다. 한 번은 자는 척하는 훈을 지그시 바라보다 입술을 맞춘 승협을 모른 체 해주었다.
“형, 오늘 옷 빨아야 돼요.”
“형, 라면 다 떨어졌...어.”
“형, 나 짜파게티 먹고 싶어. 그거 면 되게 달아.”
문득 훈의 뒷사정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쳐다보면 이내 눈을 피해버리는 훈을 보며 승협은 주먹을 말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서 훈에게 줄 어떤 것을 찾았다. 그러면 훈은 슬쩍 다가와 이상한 곳을 뒤지고 있는 승협을 밀어내며 이거 찾고 있었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하루는 가만히 천장에 묻은 이상한 자국 개수를 세던 승협의 옆에 훈이 누웠다. 승협은 딱히 내색하지 않으려 계속 천장만 바라보았고, 훈은 대자로 뻗어있던 승협의 팔을 베고 빤히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린 승협의 흑갈색 눈과 새까만 눈동자가 마주친 후에야 아무 것도 바르지 않아도 선홍빛을 띠는 입술이 움직였다.
“형 사실 궁금했지. 내가 왜 자꾸만 놀이터에서 잤는지.”
승협이 훈을 집에 데려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었다. 그 사이에 훈은 승협에게 말을 놓았고, 승협은 아무렇지도 않게 훈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동네 슈퍼에 나가곤 했다. 그리고 훈은 그 팔을 굳이 치우지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다가가지도 않았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말해주려고?”
“응.”
“말하고 싶어졌어?”
“응.”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어줄게. 왜 그랬어?”
훈은 타의적 가출청소년이었다. 네가 맡아라, 네가 맡아라하는 부모 밑에 더 이상 머물기 싫어 무턱대고 나온 집에 다시 돌아가긴 싫었다. 그래도 아예 밖에서 살 요령은 없었다. 돈도 없었고, 살아갈 지혜도 없었으며, 어린 소년 혼자 살기엔 이 세상은 무서운 곳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시간을 틈타 집에서 씻는다거나, 먹을 것을 챙겨 부모님이 돌아오기 전에 집을 나오곤 했다. 머물 곳이 없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집에서 챙긴 요깃거리를 먹고, 잠은 사람 안 돌아다니는 놀이터에서 잠을 청했다. 바로 앞에 편의점 불빛이 놀이터를 살살 비추고 있어 그리 무섭지도 않았다.
그 날 훈은 저도 모르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집 엄마, 아빠들은 안 이러던데.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나서 이 개고생을 하면서 사는 거지? 난 왜 평범한 부모 밑에 나지 않은 거지? 자식이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부모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애를 갖지도 못했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저를 아껴주던 다른 가족들이라든가 이렇게 되기 전 화목했던 가정의 장면 같은 것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훈의 눈을 계속 건드렸다. 결국 훈은 제 손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 새까만 운동화가 형체를 드러냈다.
승협은 그의 품에 더 파고드는 훈을 슬며시 감싸 안았다. 마른 훈의 몸이 들어오고도 남은 품 안에 바람이 숭숭 들어와 팔로 그를 더 꼭 껴안았다.
커튼을 달지 못한 창을 지나 햇빛이 승협의 눈꺼풀을 간질였다. 미간을 찌푸리더니 눈을 뜬 승협은 아직 자신을 안고 곤히 자는 훈의 정수리를 보다 머리맡으로 팔을 뻗어 휴대폰을 찾았다. 돈이 아까워서 전화와 문자만 되는 공짜폰으로 사는 바람에 가끔 잡히는 공공 와이파이를 빼곤 세상 사정을 구경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폰에도 나랏일은 잘 전달이 되는지, 전원을 켜자마자 뜨는 커다란 문자에 승협이 눈을 감았다 뜨며 초점을 맞추었다. 빨간 확성기 이모티콘과 굵고 검은 글자들. 밤새 지진이라도 났나 싶어 눈가를 비비고 다시 쳐다보니, 평생 글이나 영화로만 접해보았던 소식이 와있었다.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감염병 발생. 현재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며 치사율이 높은 것으로 보이므로 충주시로의 출입을 통제함. 열이 나는 증세를 보일 시 감염 위험이 있으니 즉시 병원으로 이송하여 격리 조치 바람.’
전염병이라... 뭐, 그런 거 우리랑 상관있나. 더 자자...
우응... 형,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냐. 더 자.
‘띵동- 띵동-’
“네... 나가요~!”
승협은 허리를 꼭 붙잡은 훈의 손을 겨우 떼어놓고 마른세수를 하며 현관문으로 향했다. 찾아올 사람 없는 집에 찾아온 손님은 어딘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왠지, 연구실 같은 데서 입어야할 것 같은 옷인데. 구제역 관련된 뉴스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래서 대체 우리 집에는 무슨 일로.
“이 지역 전체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여기, 안내서 받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용건은 짧았다. 이 흰 종이 몇 장에 모든 것이 담겨 있나보다. 깨알 같은 글씨는 참 사람이 읽기 싫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사람들 인상이 무서워서라도 읽어야할 것 같았다. 가장 작은 글씨들보다 조금 큰 글씨가 제목인 건지. 보호구역 생활 지침서. 왠지 일단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까, 그... 전염병 머시기 때문에 보호 구역을 정한 건가? 꽤 가까이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깬 훈이 자리에 누운 채로 승협에게 팔을 뻗었다.
“형... 누구야...?”
“어... 나도 몰라. 우리나라에 무슨 전염병 같은 게 퍼졌는데, 여기가 보호구역으로 정해졌나봐.”
“좋네, 뭐... 나 다시 자도 되는 거지...”
“응, 더 자. 아직 9시 조금 넘었어.”
“우웅...”
이미 잠이 다 깨버린 승협은 훈의 옆에 조용히 앉아 받은 종이들을 읽기 시작했다.
보호구역 생활 지침서라... 상황이 꽤 심각한가. 이름도 모르는 병이라고? 그런 병이 아직도 남아있었어? 열이 심하게 나다가 이상행동을 보이며... 뭐 좀비야? 이후에는 독살된 것처럼 피부가 검게 그을려 죽는 병... 뭐야, 진짜 좀비야? 뭐야. 뭐 이런 병이 다 있어. 어디 보자, 식량과 물 배급 외에는 바깥출입을 삼갈 것. 알바도 가면 안 되나. 아니다. 물이랑 음식 준다는데 뭐... 받은 물이라도 끓여먹고... 받은 식량 외에는 취식하지 말 것. 거참 까다롭네. 만약 외출 시에는 집에 돌아와 바로 몸을 깨끗이 씻을 것. 하루에 손을 다섯 번 이상 씻을 것. 약간 초등학생 바른생활 교과서 읽는 기분이야. 매주 월, 수, 토요일은 소독. 이건 사람이 온다니까 우리가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고. 참 살려면 할 일 많네. 감염 의심 증세를 보일 시 즉각 본부로 이송할 것.
펄럭펄럭.
뭐 뒷내용은 주저리주저리 할 말 늘어놓은 것 같고. 식량 받으러 가는 게 언제였더라...
하루하루 식량과 갖가지 것들을 보급 받으며 살아가는 생활은 익숙해지기 매우 편리했다. 그냥 정해진 시간에 뭐 마스크 같은 것을 쓰고 본부로 가면 우리보다 더 철저히 흰색 커다란 옷까지 입은 - 연구원 옷이라고 해야 하나? - 남자들이 커다란 봉투를 준다. 그럼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집에 와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우리는 집에 갇혔다. 보급 시간 외에는 일체 외출이 금지되었으며, 집 안에서만 살아야하는 그런 지루한 일이 생겼다. 그런데 우리는 일도 안 해도 되고, 그저 받기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편했기에 지루함에 대한 불만도 없었다. 뭐, 먹고 살게 해주고, 안전하게 보호까지 해준다는데. 일주일에 한 번 받는 소독도 집에 나타나는 벌레들을 없애줘서 마음에 들었다. 그럴 때마다 소독약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음식들을 옮겨야하는 것은 귀찮았지만.
전염병이라는 것이 돌기 시작한지 대충 한 달 정도 되었다.
“형, 우리 막 영화에서 본 것처럼 이 병에 면역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거 있잖아. 주인공 버프 같은 거. 형이 맨날 그랬잖아.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면역 같은 소리하지 마. 그래도 주인공 버프는 조금 있는 것 같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니까 정부에서 소독도 해주고, 얼마나 좋아. 매일 보는 게 일상이던 바 선생들도 안 보이잖아. 그것마저 없었으면 우리는 감염 우선순위 0순위라고.”
“맞아, 그건 좋아.”
보급 받은 생수 물병 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뚜껑을 따 목을 축였다. 캬아- 하는 훈을 보며 빨래를 개던 승협이 피식 웃었다. 맛있냐? 엉. 보급 받는 식량보다 천 배는 맛있어. 그런 거 좀 맛있게 못 만드나 몰라. 궁시렁거리지 말고 빨래나 개. 넵, 알겠습니다.
이따금 훈은 얼렁뚱땅한 소리를 하고는 했다. 대개 그 행동은 이불 위에 누웠을 때 천장 벽지의 무늬를 파악하면서 이루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승협은 이상한 소리하지 말라며 일어나 집안일이나 하라고 토닥였다.
“있잖아, 형. 지금 도는 병이 좀비 같은 게 아니어서 정말 다행인 것 같아. 적어도 감염될 때 아프진 않다는 거잖아. 그리고 죽을 때도 조용히 죽을 수 있고.”
“또 헛소리한다. 이상행동을 보인다잖아. 그게 좀비 같은 걸지도 몰라. 일어나서 이불 다시 펴. 다 삐뚤어졌어.”
치- 하며 얌전히 일어나 삐뚤어진 이불을 바로잡는 훈이었다.
“형, 오늘은 보급 나도 같이 가.”
“굳이 안 나가는 게 좋을 텐데.”
아냐, 나도 가볼래. 훈은 승협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운동화를 신었다. 승협은 그런 훈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자기는 보급이라도 받으러 밖에 나다니곤 했지만, 훈은 전혀 집 밖에 나가지를 못했다. 계속 집에만 눌러앉아 있었으니 저 같아도 허리가 쑤실 만했다. 훈의 콧등 위에 얹어진 마스크의 철심을 한 번 더 꼭 눌러 밀착시켰다.
본부로 가는 길에는 외부와의 출입을 관리하는 ‘경계’라는 것이 존재했다. 승협은 훈보다 먼저 그것을 보고 다른 길로 가야하나 고민했지만, 그 생각이 점을 몇 개 찍는 동안 훈은 이미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곳은 항상 보호구역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 중에는 정말 안타까운 경우도 있어서 승협도 눈살을 찌푸리며 애써 외면하고 본부로 향하는 일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그 장면을 훈만은 보지를 않길 바랐는데.
“훈아, 얼른 가자.”
“형. 잠깐만.”
역시나 훈은 눈을 떼지 못했다. 얼떨결에 두 사람이 빤히 쳐다보게 된 장면은 절규하는 어머니와 그 품에 안겨있는 아기였다.
“글쎄, 애가 감염 증세를 보이면 들어오는 것이 불가하단 말입니다.”
“제발요, 애잖아요. 여기 아니면 우리 애를 못 살려요. 제발. 제발...”
“안 된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아기가 감염된 모양이었다. 멀리서 보아도 얼굴이 제법 붉은 것이 열이 펄펄 끓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 백신 있다며!!! 백신이 있으면 사람들한테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니야?!”
“없다니까 그러네요. 어서 나가주세요.”
흰 옷의 사내는 어머니를 살살 밀어 내보내려고 했다. 그러다 그 엄마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고, 엉엉 울며 자신의 아기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아기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엄마의 어깨를 무는 모습을 보았다. 승협은 그걸 보고 굳은 훈의 어깨를 돌려 본부 쪽으로 향했다. 잊어, 잊어, 라고 계속 되뇌면서. 자신은 그런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아서 이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훈이라면 분명히, 세상의 비극에 절망하면서, 제 자신이 무너질 것이 뻔했다. 그럴 훈을 알았기 때문에 승협은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보급을 받고 나서도, 집에 도착해서도 훈은 말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다시 평소처럼 이불에 누워서 이번엔 이불 패턴을 분석하다가, 승협에게 등을 돌린 상태에서 웅얼거렸다.
“형, 나 그냥 죽고 싶어. 이런 세상에 더 이상 살기 싫어.”
승협은 그저 평소처럼 받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물 끓여 먹기 귀찮아서 그러는 거지? 오늘 받아 온 물이나 끓여줘. 부탁할게.”
“부탁이라면야...”
승협의 대답에 훈은 금세 평소로 되돌아왔다. 그날 밤, 훈을 품에 안은 승협은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몇 올씩 정리해주면서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고,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라고. 이 사태에서 감염이 되면 보호구역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게 맞는 거고. 만에 하나 백신이 개발되면 아마 사람들에게 줄 거야. 그렇고말고.
말을 듣기는 들은 건지 얼마 되지 않아 훈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잔잔함에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훈의 허리에 가져가 끌어안았다.
“하아... 하.....흐....”
아침 햇살에 눈을 뜬 승협이 마주한 것은 뜨겁게 닿은 훈의 살결과 제 어깨 언저리에 내뿜어지는 뜨거운 숨결이었다. 상황 짐작이 끝난 승협은 이불을 끌어올려 훈의 머리까지 덮고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고 토닥여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