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사망 소재가 나옵니다. 주의해주세요.
* 약 혚쾌 요소가 있습니다.
1. 크리스마스와 이승협
성탄은 조용했다. 아무도 예수의 탄생을 반기지 않았다. 딱 한 명 빼고. 승협은 달력에 엑스표를 치며 짧은 한 마디를 던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벽 쪽을 향했던 승협이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팍 구겼다. 섭섭하게 입 다물고 있기야? 그제야 재현이 건성으로 답했다. 어, 메리 크리스마스. 비교적 어린 두 아이는 잠에 들었고 훈은 줄이 하나 나가버린 기타를 두들기고 있었다. 누구의 것일지 모르는 혈액이 얼룩져 있었다. 줄 하나 없는 캐롤을 연주하던 훈이 이내 기타를 내려놓았다. 더러워.
죽은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시대.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직거리던 라디오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내 눈을 뜬 회승이 어제 다리에 감아 두었던 붕대를 팔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참, 물이 다 떨어졌구나. 승협은 언젠가 회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이기죠. 결연한 표정의 회승은 나서야만 했던 문을 나섰다. 승협은 다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라는 인사 한 마디 같은 걸 내 주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언제 생동하는 시체가 될지 모르는 세상. 말뿐인 생존은 의미가 없었다. 회승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승협은 부러 시선을 피했다. 문이 닫히고 소리가 나지 않는 도어락이 잠겼다. 그리고 모두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승협은 여전히 달력의 날짜를 세었고, 훈은 내려놓았던 기타를 다시 집어들었으며 재현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동성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제는 달력 옆 창문을 응시하던 승협의 눈에 회승이 작은 점처럼 멀어져 갔다. 회승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걸으며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승협의 귀에 기타 줄을 튕기는 소리가 멎었다. 훈은 기타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 보초를 서지는 않아도 집 안을 지키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으니 피곤했겠지. 승협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회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치지 마, 죽지 마. 회승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그제야 입안을 맴돌았다. 승협은 괜히 속이 쓰려 침을 삼켰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아야 했다. 작고 어두운 컨테이너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내가 너희를 지켜야 할 텐데 말이야.
2. 유회승
회승은 생각했다. 오늘 내가 여기에서 죽어 버려도 이상할 것 없을 거라고. 그것들과 같은 종류가 되어 스스로 제 가족과 다름없는 -지금쯤 회색 컨테이너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이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러나 회승은 살고 싶었다.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났을 때를 기약한 적이 있다. 회승은 그 약속 하나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살아남고 있었다. 포기하려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비좁은 컨테이너 그 안에 약속의 주인공이 있었다. 하나의 종말이 지나고 난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는 순간 함께이고 싶었다. 제가 모를 그의 앞으로가 분해서. 필사적으로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해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으러 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회승은 한때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였을, 어쩌면 제 주변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을 이들의 마지막 숨을 완벽히 끊어내야 했다. 괴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괴로운 회승은 또 하나의 달려드는 그것을 처리했다. 그것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허무하다. 허무해. 껍데기뿐인 몸마저 쓸 수 없게 되면 잿가루처럼 부서져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허무해. 그것들의 삶이 쥐어짜내는 마지막 발악이라고 표현할 그 무언가. 제 사랑을 위해 타인들의 그 발악을 파괴하는 행위. 윤리 의식 같은 건 이미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것들보다 정말 살아 있는 우리가 더 나쁜 건 아닐까. 어쩌면 전부 의미 없는 걸까. 어쨌든 그것들이 지배하게 되려나. 결국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싸그리 사라지려나. 회승은 생각했다.
회승이 다시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것들을 막으려 여기저기로 넘어지고 구른 탓에 쓸린 상처가 그제야 쓰렸다. 성탄이 저물고 있었다. 내년 크리스마스는 우리 트리도 사서 꾸미고 캐롤도 틀어 놓을까요. 그저 입가를 맴돌기만 한 말이었다. 자꾸만 지킬 수 있을지도 불분명한 약속이 늘어날까 봐. 현실과 동떨어진 모든 것으로 위안을 삼는 일에 너무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회승을 반기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왔어?
...승협이 형.
응.
물, 어디에 둘까요?
저기, 박스 옆에, 응. 동성이 발치에.
...
음, 또?
오늘은 이게 다예요. 아래쪽 마트도 물이 끊겨 버려서 위쪽으로 가야 해요. 산 하나 넘고. 그래서 좀 늦었어요.
응.
그 이후로 다른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승협은 줄곧 말을 아끼고 있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책임감이 강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회승은 물통을 내려 두고 달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메리 크리스, 까지 써 놓았다가 그 위에 볼펜을 죽죽 그어 버린 익숙한 필체가 눈에 띄었다. 12월 25일이었다. 아, 크리스마스였나. 회승은 의미 없이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그리고 몇 분째 고요하던 컨테이너 속 침묵을 깨뜨렸다. 승협이 형 눈 좀 붙여요. 이승협은 책임감이 강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서 회승은 조금이라도 더, 하나라도 더 승협이 가진 짐을 나눠 들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승협의 입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견고했다.
나갔다 와서 피곤할 텐데 너 먼저 자. 나는 애들 좀만 더 재운 다음에... 좀만 있다가. 깨우고 나서 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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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회승의 바로 옆에는 승협이 고개를 숙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조용했다. 애들 깨우고 잔다더니 무슨, 보나마나 누구 하나 눈 뜰 때까지 자기가 보초 서려고 했겠지. 하루 꼬박 잠도 안 잤으면서. 무심코 시선을 달력으로 향했던 회승이 잠깐 멈칫하다 이내 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승협을 바라보았을 때도 여전히 조용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조금 바스락거리던 승협은 잠시 눈을 뜨더니 불편한 자세를 불편하게 고쳐 앉고 다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회승이 올곧게 승협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게 제 손끝만 내려다보던 눈동자를 이내 천장으로 옮겼다. 그냥... 그냥 회색 철제 컨테이너였다. 마침내 승협이 조금 더 깊은 잠에 빠지자 회승은 조심스레 승협의 머리를 제 어깨로 기대었다. 회승이 승협의 새카만 머리를 가만 쓸었다. 이 사람은 제가 다 끌고 가려고 하지. 연고 하나 없이 만나 이 온통 회색뿐인 컨테이너를 정착지로 삼고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저보다 어린 넷을 제 어깨에 전부 짊어지려고 발버둥치다 이렇게. 정작 자기는 어디 기대려고도 안 하면서. 좀 기대지. 기대도 되는데, 이렇게.
3. 김재현-1
재현은 그때 무서웠다. 머릿속이 하얘서는 죽어라 달리기만 했다.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신발도 없이, 맨발이 까지고 쓸리는 것도 모르고. 남들이 보기에는 웃긴 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땐 모두가 혼비백산이었으며 재현에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었다. 단지 당장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굳어서 풀썩 쓰러질 것 같을 때까지 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이미 모르는 곳이었을 만큼 오래 달렸다. 재현은 넘어갈 것 같은 숨을 겨우 다잡고서야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재현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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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은 누군가 컨테이너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곁을 영영 떠나버릴 수도 있고. 그런 상상은 하기도 싫었고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어디 안 가면 안 돼? 같은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살아야 했고 살기 위해서는 어쨌든 누군가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물론 재현이 그런 말로 제가 혼자 죽어라 도망친 일을 합리화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단순 체념이었다. 재현은 회승이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잠들지 못했다. 사실은 새로운 가족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모자로 얼굴을 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깨어 있는 승협에게 또 다른 책임감과 동정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재현은 언제나처럼 숨죽여 울었다. 제 죄책감이 점점 크기를 불리고 있었다.
4. 차훈
삑, 삑, 삑. 일정한 기계음이 실내를 메우고 있었다. 천천히 뜬 눈 그 앞에 보이는 건 훈의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여섯 달은 넘긴 달력이었다. 그동안 훈은 길고 오랜 꿈을 꾸었다. 여섯 달이라는 기간을 이렇게 가늠하기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훈은 여섯 달이면 집에 있는 로망이는 훌쩍 커졌을까, 아이폰 12는 나왔을까 따위의 시시한 생각을 하다가, 눈을 떴는데 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다가, 갑자기 바깥이 궁금해졌다. 여긴 어디일까. 그러나 일어나기도 힘든 몸을 간신히 일으켜 내다본 창밖은 훈의 상상과 너무 달랐다. 가끔 들려오는 누군가의 일정한 발자국을 제외하곤 지나치게 조용한 실내.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도 모호한 것들이 괴성을 내며 돌아다니는 바깥. 아무도 없을 수밖에 없겠구나, 괜히 씁쓸해지는 기분이었는데- 그 순간 기계 전원이 꺼졌다. 곧 발자국이 이리로 오는 소리가 들렸다. 훈은 그대로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발자국은 바깥의 그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와 별개로 훈의 직감은 말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시간이겠지.
훈이 있는 곳의 문을 밀어젖혀 일어났냐 물어보는 이는 저보다도 앳되어 보였다.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얼굴에 무겁고 큰 가운이 어울리지 않았다. 훈은 짧게 물었다. 이제 나가야 하는 거, 맞죠? 어린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꺼비집이 방금 파손됐거든요.
...
밤이 되기 전에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의지할 데 없는 두 어린 청년이 동행했다. 훈은 이런 곳에서 인연을 만드는 일이 달갑지 않았지만 여섯 달을 누워 있던 훈은 걷는 게 불편했다. 걸을 수만 있었다면 혼자 움직였을 텐데. 잃는 것이 두려워 얻는 것을 포기하던 훈은 사실 더 이상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뜬 병실에는 여섯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으며 그건 세상이 종말을 맞은 까닭임이 훈을 괴롭게 했다. 훈은 오로지 저를 빼고 흘러간, 저 혼자 잃어버린 여섯 달을 되찾고 싶었다. 제가 가진 마지막 기억처럼 익숙하고 다정한 세계로. 그때가 되면 새 인연을 만들고 싶었다. 이 악몽에서 -훈은 길고 나쁜 악몽을 꾼다고 생각했다- 깨어난 후에. 그렇다면, 그렇게 바라던 대로 눈을 뜨고 나면 꿈 속에서 맺은 인연은 바스라지겠지. 그래서 아직 혼자이고 싶었다. 그래도 훈은, 거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와중에 의지할 구석이 없었으므로, 저를 돕고 있는 이 작은 의사를 일단 믿기야 믿었다. 그뿐이었으며 어쨌든 마찬가지로 꿈을 깨고 나면 연기처럼 사라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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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훈은 그날따라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있다 보면 눈이 떠지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누워 있던 훈의 옆에 재현이 길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얜 또 언제 잠든 거야. 훈은 혼자 깨어 있을 승협을 위해 억지로라도 눈을 뜨려고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재현이 울고 있었다. 아주아주 조용했지만 재현이 삼키는 숨이 축축했다. 훈은 따라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우는 건 재현이가, 그리고 승협이 형이 회승이가 동성이가 이 긴 꿈을 끝내고 마치 없었던 것처럼 바스라지는 날에 하기로 했다. 훈은 여전히 이게 꿈인 양 굴었다. 모두 언젠가는 제 눈앞에 사라질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 편이 덜 상처받지 않을까 싶어 세우는 바보 같은 방어기제였다. 사실은 그걸 저도 알고 있었다.
5. 서동성-1
동성은 의료용 메스가 살상무기로 돌변하는 순간이 두려웠지만 끝까지 버텼다. 누군가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운운하며 동성을 칭찬한다면 정중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단지 아직 수도가 끊기지 않은 이 내부가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병원 안이 휑한 것도 그런 판단에 한몫했다. 의료 실습 나온 동료들과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분들이 전부 빠져나간 종합병원 안에는 환자 몇과 저뿐이었다. 그마저도 절반은 약이 떨어져 죽었고 나머지는 병원을 탈출해 버렸다. 남은 건 한 명뿐이었다. 반년 전쯤에 갑작스러운 의식 불명으로 실려왔던 환자라고 했나. 동성이 기억하는 건 그뿐이었다. 그는 깨어날 가망을 모른 채로 쭉 누워 있었다. 안전을 위해 겨우 유지해 두던 두꺼비집이 고장났을 때, 동성은 마지막 환자에게 닿지 않을 마지막 인사를 할 각오로 그의 병실을 방문했다. 그가 일어나 앉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동성은 부러 담담하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일어났어요?
...네.
...
이제 나가야 하는 거, 맞죠?
동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반년 동안 가지런히 환자의 옆에 놓여 있던 신발이며 옷가지를 그에게 주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시켰다. 동성은 그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병원에 치료용 약물 따위는 남지 않았지만 구급상자는 여전히 충분했다. 몇 환자들이 탈출하면서 절반 넘게 털어갔다 해도 두 명분은 넘게 남아 있었다. 병원에 머무를 수도 있었겠지만 동성의 판단으로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두꺼비집의 파손은 그것들 짓이었다. 아니라고 해도 악의 있는 자의 소행일 것이 분명하므로 병원은 곧 그것들의 소굴이 될 테지. 동성은 끊임없이 계산했다. 그 틈에 환자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걷는 걸 힘들어했다. 반년 동안 근육을 쓰지 않았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동성은 왠지 불안해 보이는 그를 휠체어에 태우고 구급 키트가 담긴 캐리어를 끌며 병원을 나섰다. 바퀴가 돌돌 굴러가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6. 서른 살의 이승협과 스물일곱의 유회승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며칠 되지 않아 새해가 찾아왔다. 이제 승협은 스물아홉이 되었고 다른 이들도 각 한 살씩을 더 먹었다. 아무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승협은 서른이 될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다 그만두었고, 말하지 않아도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난히 고요한 신정이었다. 신정. 어쩌면, 어느 다른 나라에서는 1월 1일이 새해가 아니고, 또 다른 나라에서는 나이를 먹는 방식도 시기도 다르며 어느 곳에서는 스물이 성년이고 어느 곳에서는 한참 어린 나이가 성년인데 서른이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승협은 그런 생각도 한 적 있다. 그럼에도, 서른 살과 관계없이도 내년 1월 1일을 기약하고 싶어지는 건 어느 약속 때문에. 모른 척도 못 하도록 지독하게 간직하고 있는 약속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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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산에서 돌아왔다고 말하는 회승에게 승협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산은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식의 말은 고사하고. 왜냐하면 가야 했으므로. 침묵이 맴돌았다. 어쩌면 이 모든 건 핑계고 두려운 걸지도 모르지. 가장 하고 싶은 말, 그리고 해야만 하는 말조차 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시답잖은 다정인 듯 보이는 진심을. 우리는 꼭 이 모든 게 끝나고 새롭게 돌아오는 해 태양이 뜨는 걸 보면서 못다 한 말을 전부 털어놓기로 약속했는데. 이 모든 게 끝나기만 하면, 서로가 으스러질 정도로 끌어안아 주기로 했는데. 스물여덟의 승협이 스물아홉의, 혹은 서른의, 어쩌면 서른하나 혹은 서른둘의 승협에게 붙들어 둔 약속이었다.
우리는 언제쯤 다시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끝나는 날이 오긴 할까. 가장 지키고 싶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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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이 되면 우리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 걸 잃고 난 세상에서, 회승이 저 포함 가장 사랑하는 다섯 명 또 그 중에 조금 더 그리고 다르게 사랑하는 이승협. 우리 그때까지 꼭 같이 있어요. 그리고 나면 내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종국에는 여든까지도 내 옆에 있어요. 그런 말은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7. 공포
훈이 다쳤다. 다행히 그것들에게 다친 건 아니지만 원래 아픈 사람이라 타격이 클까 봐. 되도록이면 바깥으로 나가는 일에서 훈은 제외시켰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밤을 새워 보초를 선 두 막내가 곯아떨어졌고 승협은 물을 길러 갔으며 재현은 보초 중이었다. 두꺼운 장갑과 테이프 등에 둘러싸여 있는 재현이 훈에게 미안한 얼굴로 부탁했다. 당장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 마트까지 걸어서 삼 분이면 되는데... 걸을 수 있겠어? 훈이 걸을 수 있었던 건 오래전부터였지만 아직은 절뚝이는 중이었다. 훈은 흔쾌히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캐리어를 들었다.
마트에 도착한 훈은 온갖 비상식품을 쓸어담았다. 마트 식품의 대부분은 이미 상했거나 곰팡이가 슬었지만 시리얼이나 과자, 에너지 바 같은 음식은 여전히 먹을 만했다. 우유 없는 시리얼이 뭐냐며 잠시 불평하던 회승이 곧 제일 열심히 식사했다는 건 그 컨테이너에서 종종 회자되는 웃음거리였다. 훈이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은 순간,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 익숙하고 끔찍한 소리가 들려오며 진열장이 무너졌다. 단 삼 초가 훈을 뒤덮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까, 진열대에 깔리고 수많은 시리얼 박스에 뒤덮인 훈은 모습도 냄새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숨이 가빠 오고 손이 덜덜 떨렸다. 진열장 반대편의 그것으로 추정되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훈의 흔적을 쫓은 듯했다. 훈은 내쉬는 숨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꿈에서 깨면? 지금처럼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 눈을 뜨면? 이렇게 모든 것과 단절된 채로 살아가야 한다면? 잠시 뒤, 다시 들리는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다 완전히 사라졌다. 훈을 찾지 못하고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그것이 가고 나서도 한참 뒤, 훈은 미약한 힘으로나마 진열대를 밀어 내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왼쪽 팔을 쓸 수가 없다는 건 바구니를 들어 보고서야 알았다. 끔찍했다. 훈은 한 팔로 들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챙겨 마트를 나왔다. 여전히 그것이 주위에 있을 지도 몰랐다. 컨테이너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쓰지 못하는 왼팔이 점점 아려 왔다. 이제는 꿈을 계속 꾸고 싶지도,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훈의 절망이 그런 식으로 훈을 괴롭혔다.
누구 하나가 입 밖으로 두려움을 내비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 컨테이너 주위에서 그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않고 넘어간 재현은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차라리 훈이한테 보초를 맡기고 내가 빨리 다녀왔더라면, 하는 마음이었다. 승협은 그런 재현에게 부러 엄한 태도였다. 네가 갔다 해도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 몰라. 그만 울고 붕대 끝 좀 잡고 있어. 재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8. 김재현-2
넌 저런 상황이 오면 어떡할래?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내가 딱 멋지게 우리 가족들 안전 지켜야지!
말이 그렇지, 그게 쉽냐?
누나, 내가 얼마나 의리 있는 남잔데!
니가?
아, 억울해!
사건 발생 당일, 초기 발생자로 추정되는 그것은 재현의 가족을 습격했다. 맹렬히, 본능만을 따라 죽은 것처럼 또 산 것처럼 뒤를 쫓아오는 그것은 영화에서나 봤던 괴생명체이고 막대한 공포였다. 재현은 두려웠다. 누나의 손을 잡아채고 달렸지만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그녀는 재현에게 먼저 가라고 소리쳤다. 숨어 있을 테니 나중에 보자. 넌 뛰어, 최대한 빨리. 지금 이거 안 놓으면 우리 둘 다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거야. 재현의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그것은 더 빠르게 그들을 쫓아왔다. 그때 재현의 누나가 사람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깡통을 던졌다. 그것이 그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녀가 재현에게 어서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재현은 달렸다. 그 선택지 외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재현이 가족들을 본 건 그의 누나가 급하게 반대쪽 골목으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그것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끌어 놓은 틈을 타 누나를 업고라도 도망쳤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았을 텐데. 재현은 그렇게 죽어라 도망치고 나서 세상이 그것들로 득실댈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놓은 적이 없다. 언젠가 제 손으로 처리해야만 했던 그것의 얼굴이 너무도 익숙하고 아픈 형태였을 때가 있었다. 거대한 탈력감이 재현을 덮쳤다.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재현은 두 번째 가족도 그런 식으로 잃게 된다면 정말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건 그것들도 부족한 물자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도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건 저를 포함한 인간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언제고 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이 두려웠다. 처참했다. 발바닥 밑 온갖 까진 살이 아물어가던 날 여느 때처럼 울고 난 후 눈물이 말라붙어 흉해진 얼굴로 휠체어를 미는 사람과 휠체어를 타는 사람 그 둘을 마주쳤을 때와 다름없는 마음이었다. 이제 누구도 모르게 울음을 삼켜야 하는 재현의 얼굴에는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 따위 더 이상 남지 않았으나 이미 갈기갈기 찢긴 속은 달리 고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 두 번째 가족을 잃어야만 하는 날이 온다면 재현은... 저 대신 그들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머리로는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확신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수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마저 재현은 치가 떨려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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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일주일 간격으로 구해 왔고, 보초는 하루에 훈과 그 주의 물 당번을 제외한 세 명이 돌아가며 서는 식이었다. 가끔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훈도 보초에 나서야 했지만. 훈은 돕고 싶어 했으나 동성이 극구 말렸다. 아직은 안 돼. 그러면 훈이 반박했다. 언제까지고 아직은, 아직은 하다가 모든 게 끝나버리면 나는 뭐가 되는데. 그러면 동성이 또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가 되려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면 그게 더 위험한 거 알잖아.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거야.
재현이 순간 흠칫 놀랐다. 그에 동성도 훈도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승협은 선잠이 들어 있었다. 보초를 나가던 회승이 억지로라도 재운 탓이었다. 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스물아홉 살 이승협은 불안감과 책임감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재현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물 당번은 나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재현은 얼마 전 누군가 떨어뜨린 권총을 집어들고 문 밖으로 나섰다. 실탄이 몇 발 남지 않아서 아껴 쓰던 참이었다. 왠지 오늘은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이들은 물을 배급받으려면 산을 두 개 넘고 마을을 지나야 했다. 재현이 몇 걸음을 옮기자마자 보초를 서던 회승이 어린아이 형상의 그것을 처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볍지 않은 표정으로 회승은 재현을 짧게 배웅했다. 다녀와요. 재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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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넘으면서 재현은 테이프로 둘둘 말아버린 손과 발로 그것들 몇을 때려 죽였다. 애초에 살아 있지 않았으니 죽였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겠다만. 가까스로 해가 지기 전에 컨테이너가 있는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재현은 저 멀리 동성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초가 바뀌었나. 훈이랑은 얘기 잘 됐을까. 재현은 여전히 사람이 두려웠고 언제는 그들에게 주는 정마저 두려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제 거처 앞을 누군가 지키고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건 당연한가 보다고, 스쳐가는 몇 초 동안 재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게 정말 몇 초 동안이었던 게 문제였다. 어째서인지 아주 외지고 흘러들어오기 힘든 곳에 있던 컨테이너 쪽으로 점점 그것들이 몰리고 있었다. 재현으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든든했던 거처가 삽시간에 포위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그 순간 재현의 머릿속에 몇 문장이 스쳤다. 재현은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누나, 내가 얼마나 의리 있는 남잔데!
···그들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넌 뛰어, 최대한 빨리.
그렇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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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아!!!!!!! 난 여기 있는데 어디 가냐 이 병신들아!!!!!!! 잡을 테면 잡아 봐!!!!!!!! 나 여기 있다니까? 얼른!!!!!!!!
재현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반응한 그것들은 재현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재현은 그때처럼, 그러나 도망치던 그때와 다른 목적으로 죽어라 뛰었다. 컨테이너에 닿기 힘든 곳으로, 최대한 멀리.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굳어서 풀썩 쓰러질 것 같을 때까지 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이미 모르는 곳이었을 만큼 오래 달렸다. 재현은 넘어갈 것 같은 숨을 겨우 다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걸로 저 많은 것들을 다 쏘긴 당연히 무리지. 그래서 재현의 총구는 방향이 정해졌다. 그것들과 재현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중이었다. 재현이 방아쇠를 당겼다. 나, 이제야 슬프지 않아.
탕-
풀썩 쓰러진 재현에게 그것들은 잠시 관심을 보이다 흩어졌다. 다시 컨테이너 쪽으로 향하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9. 서동성-2
이쪽으로 오지 말아주실래요.
...울었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많이 울었구나. 동성이 본 재현의 첫인상이었다. 인근에 버려진 마트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참이었다. 그때의 훈은 제법 걸을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휠체어를 타지 않았다. 재현이 날 선 마음인 것처럼 위장한 공포심은 동성에게까지 전해졌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자, 맨발이었다. 온갖 생채기와 멍이 아무는 중이었다. 동성이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근처에 신발 같은 건 없나 찾아볼까요.
동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하지만 그쪽처럼 건장한 분이 그러고 다니시다가 그것들에 당하면 저희는 어쩌라고 그러세요.
...
재현이 아무 말 없이 동성을 노려보았다. 동성은 제 옆에 서 있는 훈을 돌아보았다. 일부러 더욱 가시를 세우는 재현도 재현이지만, 왠지 훈도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그 이유를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러자 동성은 머지않아 제 옷자락을 잡아끄는 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뜸을 들이던 훈이 입을 열었다. 그냥 가자. 동성이 훈을 마주 보고 대답했다. 우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어. 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꿈일 뿐이잖아. 동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현은 여전히 동성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서동성이라고 합니다.
그냥 가세요.
잘 부탁드려요. 물이라도 드실래요?
동성이 물병을 꺼내 들었다. 조금 아픈 얼굴이었다. 우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어.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끝이 꼭 우리일 수는 없었다. 동성이 차마 웃지 못한 얼굴로 재현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재현도 그제야 곧 쓰러질 것 같은 갈증을 체감하고 동성이 내미는 물을 마다 않았다. 그렇게 세 명은 동행하게 되었다. 동성은 제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저를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고 여겼다. 그깟 몇 년, 몇십 년의 삶을 더 얻자고 타인을 이용하는 제가 추악하다고까지 생각했다. 동성이 손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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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아닌 약한 인간 동성은, 그 뒤로 도착한 마트에서 마주친 다른 두 남자와 합류하면서도, 그 이후로 몇 주가 지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동성은 제가 그럴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를 그들의 편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안정을 얻었다. 보초를 서며 그것들을 여러 차례 막아낼 때도, 그들과 그 좁은 컨테이너 안에서 나란히 잠들 때도, 물을 구하러 산을 넘고 큰길을 따라 쭉 걸을 때도. 그래서 동성은 무너졌다. 또 하나의 그것을 처리하면서 어쩌다 긁힌 제 얼굴에 핏방울이 맺힌 순간부터. 그것들은 냄새를 맡고 몰려오기 시작했으며 저 멀리에 물통을 이고 돌아오는 재현이 보였다. 그 얼굴이 저를 노려보던 어느 날과 겹쳤다. 동성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제가 서 있는 곳은 컨테이너 입구였다. 어쩌지, 어쩌지. 동성은 삽시간에 몰려드는 그것들을 전부 막아낼 수 없었다. 이렇게 끝인 건가. 여기서 내가 지키지 못하면, 이 컨테이너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는데. 어쩌면 좋지. 반대편엔 재현이 있다. 우선 재현을 오른쪽 빈 집으로 피신시키고... 무기라면 들고 있을 테니까... 동성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제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할 선택지는 동성의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제가 속한 집단을 넘치게 사랑하는 인간 서동성.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재현에게 신호를 보내려던 순간이었다. 재현이 제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이것들아!!!!!!! 난 여기 있는데 어디 가냐 이 병신들아!!!!!!! 잡을 테면 잡아 봐!!!!!!!! 나 여기 있다니까? 얼른!!!!!!!!
재현이 왔던 길을 되짚어 뛰어갔다. 동성이 그를 뒤쫓으려 했지만 수많은 그것들이 동성의 시야를 가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성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란을 듣고도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컨테이너 내부의 세 사람이 떠올랐다. 창 밖으로 모든 걸 지켜보며 자책에 시달릴 승협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현은 어떻게 됐을지... 답은 뻔했다. 가장 인정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 동성은 차마 울 수도 없었다. 얼마 안 있어 멀리서 총성이 울려퍼졌다. 동성은 곧이은 또 하나의 총성이 들리길 절박하게 기다렸으나 그게 끝이었다.
그게, 재현의, 끝이었다.
10. 그냥 회색 철제 컨테이너
승협은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어딘가 숨어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가 나가 볼게. 여길 지켜줘, 부탁이야. 그렇게 말하는 승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어서 동성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다 내가 그런 마음을 먹어서 그래. 나 혼자 살아남으려고 해서 그래... 여전히 창백한 승협은 황급히 밖으로 나갔고 모두에게는 그를 뜯어말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눈물을 터뜨린 동성에게 훈이 한 마디를 얹었다. 네 탓 아냐. 동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훈도 제 속내를 몰랐으니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정작, 의연하게 그런 말을 하던 훈은 더 이상 이곳이 꿈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꿈이라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잖아. 훈은, 앞으로 더 있을지도 모르는 상실에 적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뼈아프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훈이 견고하게 세워 둔 방어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빨 빠진 듯이, 재현의 자리만 텅 빈 채로 밀려드는 따뜻함과 차가움이 훈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훈은 눈을 감아버렸다. 일단 저는 둘째치고, 아까부터 회승은 지친 얼굴로 몇 시간째 말이 없던 참이었다. 공허한 눈동자였다. 그는 전의를 상실해 버린 채로 테이프 따위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의아한 얼굴의 동성에 회승이 허탈하게 답했다. 보초, 계속 서야지. 동성은 그런 회승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초? 지금? 동성의 목소리가 분노로 가득 찼다. 그 분노는 어쩌면 회승이 아니라 제게 향하는 것이었다.
보초, 웃기고 있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 한 명조차 못 지켰으면서...
동성아.
내가, 내가... 그런 생각으로 모두를 여기 모으지만 않았어도.
네 잘못이 아니라니까.
내가 얼마나 더럽고 나쁜 인간인지 알기나 해요?
야.
이용해먹을 생각이었어...
이런 데서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있냐?
...
나라고 그런 마음 안 먹은 줄 알아? 나라고 모두를 지키겠어, 하면서 용사 노릇 자처했을 줄 아냐고.
근데 재현이 형은...
그 형은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을걸? 네가 걔 옆에 두 번째 가족을 만들어 줬을 때부터.
...
한 번만 더 그딴 말 하기만 해 봐.
회승은 울컥 눈물을 터뜨리지도 분노에 차서 물건을 부수지도 않았지만 그 순간 누구보다 처절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에서도 재현을 찾지 못하고, 혹은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하고 힘없이 돌아와 주저앉아 버릴지도 모르는 승협에게 우린 아직도 문 앞을 지키고 있다고 말해주러, 회승은 보초를 섰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말했어도 동료의 죽음은 회승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몇 번이고 다리가 꼬였지만, 저 멀리서 쓰러질 듯 걸어오는 승협에게 회승은 한 발짝씩 다가갔다. 당장 김재현을 보내주자거나 잊으라거나 괜찮다거나 하는 말들을 해 주려고 걷는 걸음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직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한 걸음이었다. 승협이 회승을 보고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회승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제야 승협도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은 제가 다 끌고 가려고 하지. 정작 자기는 어디 기대려고도 안 하면서.
승협이 회승에게 무너지듯 안겼다. 승협의 짐이 어딘가로 내팽개쳐지고 남은 건 오로지 그들뿐이었다. 동시에 승협은 생각했다. 내가 너희를 지킬 필요는 없겠다고. 스스로 살아갈 힘을 지닌 어리고 단단한 아이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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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첫눈이 오면 여길 떠나자.
날이 밝자 승협이 꺼낸 첫마디였다. 외지고 외진 곳을 찾아 흘러들어온 이 그냥 회색 철제 컨테이너 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두가 승협의 결정에 동의했다. 훈은 주워서 광을 낸 다음 컨테이너 한켠에 세워둔 기타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승협을 비롯한 모두는 이곳에 재현을 두고 가야 했다. 눈이 오는 날. 잠시 체취를 숨긴 틈을 타서. 1월이 한참 넘었음에도 첫눈은 오지 않았다.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기로.
11. 첫눈
영영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시라도 빨리 오기를 바라기도 했던 첫눈은 1월의 마지막 날 무릎까지 파묻힐 정도로 내렸다. 그날도 보초를 선 회승을 제외하고 혼자 깨어 있던 승협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잠든 둘을 흔들어 깨웠다. 훈은 이제 거의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뜀박질도 가능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느 날 승협이 했던 말처럼. -눈 오는 날에 다같이 여기서 도망치자. 어디든, 어디든 이 파멸이 종말하는 곳으로.-
마트에 도착한 그들은 최대한 많이 남은 식량을 쓸어담았다. 목적지 없는 어딘가로 떠나면서 그들은 살아남는 일을 생각해야 했다. 그래도, 승협의 무거운 짐은 더 이상 긴 여행에 함께하지 않았다. 훈은 더 이상 이곳을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회승은 승협을 동정하는 대신 다시 사랑했고 동성은 이제 '추악한' 저에 대한 연민을 내려놓았다. 모든 게 잘 된 것 같았다. 승협은, 비로소 웃었다. 어쩐지 바깥에 그것들이 하나 둘 몰려드는 걸 보면서도 웃었다. 습기가 그들의 체취를 숨기는 대신 머금었나 보다는 건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희극인 줄 알았던 비극' 이라고 판명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종말을 맞은 세상에서 이런 엔딩은 그들에게 분명한 희극이었다. 이거, 재현이가 몰고 갔던 그것들이구나. 승협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제가 가장 잘 알았다. 잠시 돌아본 훈과 회승과 동성의 얼굴도 비슷했다. 하나 지키지 못한 약속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함께할 수 있는 것으로 묻어 두기로 했다. 회승은 마주 웃어주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이제는 내년을 기약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잖아?
밖에는 여전히 약속했던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점점 수를 불려 건물 밖을 덮치고 있었다. 외벽이 통유리로 된 건물은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승협이 이내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이들을 전부 감싸 안았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으나 첨언했다. 지키려는 게 아니라 함께하려는 거야. 제 마지막을, 그들을 지키는 대신 그들과 함께인 채로 맞이하고 싶었던 그의 작은 바람을 확신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승협은 열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서로를 부둥켜안은 서로의 마지막 인연들. 그들의 눈앞으로 유리 파편들이 얼음 조각같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눈이 오는 듯이... 그래, 눈이 오는구나. 이렇게 많은 것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바닥에 쌓이는데. 그러니까, 약속했던 것처럼 우리 이제 도망가자. 이 파멸이 종말하는 곳으로.
승협이 바닥에 떨군 칼을 집어들었다. 몰아치던 눈보라가 그들이 함께한 마지막 장소로 들이쳐 쌓이고 남은 건 붉게 물든 새하얀 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