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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 듯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하얬다. 마치 무언가가 쓰이기 직전의 두꺼운 새 노트처럼. 훈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무언가를 쓰듯 손을 휘저었다. 훈의 눈에만 보이는 글자가 빈 하늘을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승협이 형 이번엔 좀 멀쩡하네?
-안 그래도 이번엔 뭘까 궁금해 하는 중이다, 재현아.
-이번엔 우리 진짜 우리 같다. 형 기억나요? 진짜 우리.
-기억나지.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통통 뛰어오는 재현이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쫑긋거리는 토끼 귀를 만들어내고는 승협을 놀리듯 말을 걸었다. 형은 어째 당황하는 일이 없어. 일부러 볼에 바람을 넣어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는 재현을 승협이 가볍게 꽁, 쥐어박았다.
-야. 내가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하긴 형 나이가...
아, 아 형. 큰 눈으로 미워할 수 없는 웃음을 짓는 재현이 승협의 오른쪽 팔에 달라붙었다. 안 그래도 막 서운해지려는 참이었는데. 사라진 어이와 시무룩해진 제 분위기를 직감하고 웃으면서 달라붙어오는 재현에 올라가려는 광대를 꾹꾹 누른 승협이 주변을 둘러봤다. 훈이는 어디있으려나. 회승이랑 동성이는?
-회승이 운동하러 갔잖아요. 요즘 몸 키운 거 봐.
-걔 가끔 보면 무섭더라. 팔뚝 봐. 얼굴은 세상 말랑하게 생겨가지고.
-건강하면 좋죠 뭐. 동성이는 자고 있을 거고. 아. 회승이 따라 운동 간댔나?
-어제 늦게까지 연습하길래 또 자겠다 싶었는데. 운동 갔어?
-몰라요. 어제 갈까 고민하던데.
머리를 긁적이던 승협이 재현을 바라봤다. 머리를 자른 기억이 없음에도 제 머리카락은 눈을 덮을 듯 말듯 한 길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눈을 찌를 듯한 머리카락은 제가 기억하는 머리 길이에서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재현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틀어 승협을 바라봤다. 재현의 머리카락이 귀 밑에서 찰랑거렸다.
-훈이나 찾으러 가자.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뒷말을 애써 삼키곤 승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협의 발이 떨어지자마자 바싹 말라버린 풀이 애써 초록빛을 유지한 채 승협의 발 모양대로 몸을 눕혔다.
-형, 훈이 저기 있다.
훈은 기타를 품에 안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훈의 옆에서 종이 위에 그려진 것 같은 풀들이 몸을 비벼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이상한데. 주제 알아내는 거 쉽지는 않겠다. 복잡한 표정을 한 승협의 뒤에서 재현이 튀어나와 훈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방해받은 훈은 곧 눈을 찌푸리곤 재현을 바라봤다.
-아 왜.
-허공만 보고 있길래 궁금해서. 거기 기타 악보라도 있냐?
-그런 거 없거든? 몰라. 생각중이야. 저리 가 김재현.
재현이 입을 삐죽이며 주황빛 머리카락이 스치는 어깨에서 손을 땠다. 형. 뭐라도 말 좀 해봐요. 훈이 찾으러 가자며. 내가? 아 형이 그랬잖아! 기억이 안 나는데. 즐겁다는 듯 광대를 한껏 올린 승협이 재현을 팔을 피해 슬슬 뒤로 도망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훈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신호탄이 된 듯 재현과 승협이 투닥거림을 멈추고 훈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푸른빛과 함께 생기를 머금은 풀들이 승협과 재현의 손을 간지럽혔다.
-훈아 뭐 하고 있었어.
-아. 승협이 형. 몰라. 갑자기 이상한 생각 들어서.
-무슨 생각?
-어쩌면 이게 다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
-형이랑, 재현이랑, 회승이랑, 동성이랑 이렇게 같이 노래하고 음악하는게 너무 즐거워서 꿈인 것 같아, 형.
-꿈이라면 안 깨졌으면 좋겠다. 승협이 혀엉, 나는 지금이 너무 좋아.
훈은 승협을 보며 행복하다는 듯 웃어보였다. 승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훈이 노래하는 이 찬란한 꿈이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버릴 것 같아서. 입에서 튀어나온 단 몇 마디의 말이 훈의 꿈을 깨어버릴 것 같아서. 실제로 승협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승협은 침묵을 택했다.
-형 이번에 주제 뭔지 알아냈어요? 이맘때쯤이면 형은 알잖아. 지금 어느 정도까지 왔어요? 거의 다 끝나가나?
-재현아.
-왜요. 이번엔 뭔데. 우리한테 말 못하는 거야?
-우리 저번에 총 맞았을 때, 그때 많이 아팠던가?
-좀 아팠죠. 물론 금방 낫긴 했지만.
-그럼 그때 우리 못 나갔을 때, 그땐 어땠지?
-말도 마요. 일어나는 일은 매일매일 똑같지, 훈이는 아무것도 모르지, 회승이랑 동성이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고 하지. 그때 결국 훈이가 깨닫고 마지막 문장 쓰고서야 끝났잖아.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근데 승협이 형.
-어.
-왜 우리 둘만 기억이 그대로지? 훈이는 그렇다 치고, 회승이랑 동성이는 아무것도 기억 못하던데.
-그건... 모르겠다. 아무튼, 재현아. 이번이 끝이야.
-왜 형. 주제가 뭔데.
-몰라.
-몰라? 형이 왜 몰라.
-진짜 몰라. 근데 재현아.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는데,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
-형 생각이야?
-어. 내 생각.
익숙하지 않은 적막이 둘을 감싸 안았다. 승협과 재현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눈에 띄게 얇아진 하늘이 승협과 재현의 눈에 들어왔다. 진짜 얼마 안 남은 것 같네. 종이 얇아진 거 봐. 맞지.
-형. 우리 어떻게 끝날까.
재현이 입꼬리를 올려 체념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애들한테 알려줘야 하나. 아니. 걔네 놀라면 뭔 짓 할지 몰라. 그렇긴 하다. 형, 이거 사실 꿈은 아닐까? 그냥 깨면 우리 모두 숙소에서 눈 뜨는 거야. 다 같이 그동안 안 좋은 꿈 꾼 거지. 그러기엔 저번에 총에 맞은 데가 욱신거린다, 재현아. 그건 형 나이가... 아, 승협이형 삐지지 마아.
-그래도.
-응.
-행복하게 끝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네.
-그럴 수 있을까?
-그럴 거야. 내가 기억하는 훈이라면.
-다행이네.
-다행이지.
-형 이거 끝나면 뭐 할 거야?
-나는... 맨 처음 했던 대로 노래 만들어야지.
-그럼 나는 북 쳐야지.
-우리 다 훈이 옆에 있지는 못하겠지만.
승협의 말에 재현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훈이, 잘 있을 수 있을까?
-잘 있어야지. 나도 잘 모르겠다.
-가기 싫다.
-나도.
-형 있잖아. 훈이 말대로, 이게 다 꿈은 아닐까?
-그럴 리가 없잖아. 재현아.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재현과 승협은 서로를 마주봤다. 마주 보는 눈빛 사이로 실낱같은 희망이 부서져 내렸다. 재현이 애꿎은 흙을 파내 작은 산을 만들었다. 산 정상 위에 동그랗게 물에 젖은 분화구가 생겨났다. 형 우리 어떡해? 나는 아직 끝내기 싫은데. 나 아직 더 있고 싶어. 재현아. 이미 우리 다 불타서 사라졌을지라도, 나는 아직 여기 더 있고 싶어. 재현아 그만. 훈이랑 형이랑 회승이랑 동성이랑 같이 있고 싶어. 나 가기 싫어.
재현이 참아내지 못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승협은 그런 재현을 가만 감싸 안았다. 형도 그래. 형도 가기 싫어. 근데, 우리는 훈이가 기억하고 만들어낸 흔적일 뿐이잖아. 우리가 계속 있으면 훈이가 못 일어나. 훈이는 돌아가야 해. 재현아 너도 알잖아. 그만 놓아줘. 그래야 훈이가 우리를 놓을 수 있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재현은 한참을 승협의 품에 안겨 울었다. 승협은 그런 재현의 등을 가만 토닥일 뿐이었다.
-형. 이번이 끝이면, 여기는 어떻게 될까.
-그러게. 형도 모르겠다. 부서지려나?
-훈이가 쓰는 것들 속이니까 그냥 그대로 있지 않을까?
-책처럼 그대로 있으려나. 하긴, 부서지면 그건 그거대로 너무 슬프잖아.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끝나겠지만, 훈이가 가끔 열어볼 수 있게.
-그렇네. 우리는 여기가 마지막이겠지만.
승협과 재현은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이 하얀 하늘을 바라봤다. 훈이 눈에는 뭘로 보일까. 눈에 띄게 얇아진 하늘 위에 머뭇거림이 보이는 듯 했다. 끝을 바라보기 싫더라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할 터였다. 그 시작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놓은 글이라면 더더욱. 승협과 재현이 보고 있는 푸르른 풀들도, 흘러가는 물도 전부 훈이 만들어낸 것일 터였다. 장맛비 같은 눈물을 쏟아낸 재현이 발갛게 짓무른 눈가를 숨기지도 못한 채로 돌아섰다. 손을 반쯤 덮은 소매로 눈을 슥슥 문질러 닦은 재현은 훈에게 인사를 해야겠다며 승협을 지나쳐 뛰어갔다.
다시 찾아간 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훈은 혼자였다. 먼저 뛰어간 재현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았다. 훈의 손끝으로 작은 균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기억 속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이었다. 허상 속에 너무 오래 머문 탓이었다. 동시에, 주인을 잃은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는 정말로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형, 스, 승협이 형,
-훈아.
-형, 재현이가 사라졌어. 갑자기 내 눈 앞에서, 갑자기,
-훈아. 형 봐.
-재현이가 갑자기 까맣게 물들어선 사라졌어. 잘 있으라고 하고는 없어졌어. 형, 승협이 형, 형.
-훈아. 여기는 네가 만들어낸 세계야.
우리는.
우리를 놓지 못한 네가 만들어낸 것들이야.
훈은 까맣게 물들기 시작한 승협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곤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느새 훈의 손에는 종이와 펜이 들려져 있었다. 훈은 제 손에 쥐여진 종이와 펜을 바라봤다. 많이 쓴 듯 절반 밖에 남아있지 않은 잉크는 펜의 끝에 맺혀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여전히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처럼 하얬다. 무언가 얇아진 것 같은 느낌만 빼면. 제 손에 들려진 종이는 어느새 한 장 밖에 남지 않았다. 거칠게 넘기느라 작게 찢어진 종이에 덜덜 떨리는 펜이 닿았다. 아. 하늘에 검은 얼룩이 생겨나고 있었다. 얼룩은 하늘을 까맣게 채우고는 땅으로 내려왔다. 땅으로 천천히 내려와 훈을 빼고는 모든 걸 까맣게 채워나갔다. 이윽고 훈만 남았다. 훈은 까맣게 칠해진 세상을 제 손으로 덮었다.
훈의 손 끝에서 피어난 추억들은 그 나름의 세계를 이루었다 찬란하게 부서져내렸다. 그들이 붉게 타올라 까맣게 사그라들었던 것처럼,

